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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140)] 수원시 하수처리장의 역사(1)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양종천밝은나라 2024. 6. 10. 09:21

[김충영 수원현미경(140)] 수원시 하수처리장의 역사(1) - 김충영 논설위원 / 도시계획학 박사

기자명김충영 논설위원 입력 2024.06.10 06:00

수원시 하수종말처리장 조감도. 2003년 2단계 하수처리장을 복개하여 골프장을 건설하기 위해 제작한 조감도.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20세기 초까지 인간의 평균수명은 30세였으나 21세기 초가 되면서 인간의 수명이 70세 이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데 의료기술이 아니라 상하수도의 보급으로 인간의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상하수도의 보급으로 물의 오염을 막을 수 있었기에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로부터 영향을 적게 받았기 때문이다.

하수도의 흔적은 인류의 4대 문명지에서도 발견됐다. 우리나라에는 1411년 태종11년 홍수로부터 도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개천공사’가 시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 대에 이르러 성곽을 지나가는 세천이 막혀 물난리가 나자 ‘2차 개천공사’가 시행됐다. 영조대에 이르러 매몰된 청계천을 준천(濬川)한 공사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화성전도. 행궁앞으로 흐르는 명당수가 남지를 거쳐 성곽 밑 은구를 통해 물이 배수된다. 화홍문과 남수문 사이의 수원천도 준설했다. (자료=수원시)

 

수원에서는 1789년 7월 15일부터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조성하기 위해 수원신읍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이때 자세한 공사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5년 후 화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도로를 확장하고 도로 양옆으로 도랑을 만들었다. 원활한 배수를 위해 수원천을 준설하고 성안의 물을 성 밖으로 흘러 보내는 은구를 만들었다. 이는 하수 처리보다 원활한 배수를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국내에 하수도시설이 도입됐다.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됐고 1882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과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을 찾는 외국인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서구인들에게 조선의 첫 인상은 불결함이었다.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불결한 도로 상황이었는데, 방치된 쓰레기와 분뇨에서 발생한 악취가 문제였다.

불결한 환경으로 인해 1895년 콜레라가 창궐해 30만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도시환경의 열악성과 불결함에 대해 지적한 사람은 수신사(修信使, 외교사절)로 활동한 김옥균, 박영효 등이었다. 이들은 미국과 일본의 위생관련 시설 관리 실태를 살펴보고 돌아와 치도(治道)의 방법으로, 첫째는 위생, 둘째는 농상(農商), 셋째는 도로분야의 발전을 강조했다. 이들이 주장한 치도사업은 갑오개혁의 실패로 실현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하수도시설 사업은 1915년 경성부가 ‘하수도 개수 7개년 계획’을 수립해 추진했다. 이 사업은 1918년에 이르러 추진됐는데 이것이 ‘제1기 하수도 개수 계획’이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추진했다. 이때 개거(노출방식)와 암거(管渠)를 검토 했으나 비용이 적게 드는 개거 방식이 적용됐다. 이후 우리나라는 하수처리장이 건설되기 전까지 우수·오수를 함께 배수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

1907년 헤르만산더가 찍은 남수문 사진. (사진=수원시)

유실된 남수문 돌을 수거하여 얇게 쪼개어 만든 우수전 뚜껑. 윤한흠 선생이 화성연구회에 기증했다. (사진=수원시)

 

지방도시의 하수도 사업은 1920년대 들어서 도입됐다. 수원에서는 ‘1922년 을축 홍수로 남수문이 유실되자 남수문 돌을 수거하여 하수도사업에 활용했다. 남수문 돌을 얇게 쪼개어 장안문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1번 국도 양옆 개거(U형)의 덮개로 활용했다.’고 수원의 옛 그림을 그린 윤한흠 선생이 증언한바 있다.

수원의 하수도 사업은 주로 대로 양옆에 개거를 설치하고 뚜껑을 덮는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소로인 경우 도로 중앙에 암거를 매설했다. 수원시 하수도에 관한 자료는 1966년 통계에는 보이지 않으나, 1967년 수원시 통계에 의하면 1965년 10만6606m, 1966년에는 11만9846m로 증가했고, 개거(측구)가 2만9044m 임을 볼 때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에 자리잡으면서 급격하게 증가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추진한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하수도가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 하수도계획이 포함되었는데, 하천수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대도시의 경우 하수종말처리장 설치를 필수조건으로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를 계기로 ‘청계천 하수처리장’ 건설계획이 수립·시행되어 1976년 청계천 하수처리장이 완공됐다.

청계천 하수처리장 완공은 지방 대도시들로 하여금 하천오염으로 인한 민원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당시 건설부(현 국토교통부)는 하수업무 개선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에 앞서 시범사업을 추진했는데, 공업도시인 울산시를 대상으로 추진했다.

1983년 건설부는 2단계로 도청 소재지급 도시를 대상으로 하수종말처리장 건설 추진계획이 시달됐다. 이 때 필자는 도시과에서 오랜 동안 근무하다 7급으로 승진해 건설과 하수계에 근무함으로써 수원시 하수도 업무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수원시의 하수도 업무는 참으로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하수종말처리장과 오수관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기에 세원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업무를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함께 근무하는 행정8급 박순용 주사와 울산시를 방문하여 그동안 추진했던 사업에 대한 자세한 계획서를 협조 받았다.

▷첫 번째 추진된 일은 기존의 하수도관을 세밀하게 조사하는 ‘하수관망도’를 작성하는 업무가 시작됐다. ▷두 번째는 하수관망도를 기초로 공공하수도가 설치된 배수구역을 지정하는 업무였는데, 이는 하수도사용료 징수를 위한 일이었다. ▷세 번째는 작성된 하수관망도를 기초로 하수처리장까지 오수를 운반하는 오수차집관로를 설계하는 일이다. ▷네 번째는 배출되는 오수를 지형을 고려해 하수처리장 위치를 선정하고 추진하는 일이었다.

1984년 하수처리장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받기 위해 당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을 찾았다. 경기도를 담당하는 사무관에게 “수원시의 하천 오염이 심각해 하수처리장 건설이 필요해서 왔다"고 하자, 담당사무관은 자세한 설명을 듣기도 전에 “수원시가 하수처리장을 만들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당장 어떻게 됩니까?” 라고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자리는 예산을 지원해주는 자리라기보다 국가예산보다 더 많게 요청하는 것을 삭감하는 자리이며,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1984년 수립한 하수도기본계획 평면도. (자료=수원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시는 하수도기본계획 수립, 하수관망도 작성, 하수도세 징수를 위한 요율산정 용역, 오수차집관거 설계용역 등을 차근차근 추진했다. 수원시는 하수도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85년 10월 31일자로 건설과 하수계를 하수과로 승격시켰다.

필자는 이날 전공부서인 도시과로 자리를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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